“무한 도전 중인 한국 대표”우·희준(59기)카바디 선수, 미스 코리아의 특수전 사령부의 군복을 벗고… 그렇긴코트에 돌아왔다”미스·카바디””내 인생을 『 도전 』이라는 단어로만 설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도전과 별도로 자신의 부족함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매 순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5년 만에 카바디 대표로 다시 황금 사냥에 나섰다.미스 코리아 첫 학군 사관(ROTC)후보생이다, 카바디 국가 대표 출신으로 “자기 소개서”전형은 쉽게 통과할 만큼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우·희준 선수가 그 중의 한 사람이다.2013년 카바디를 인연을 맺고 2015년에 태극 마크를 달고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대회에 출전했다.그는 자카르타 대회를 마친 뒤 2019년 미스 코리아 선에 선정되어 한국 대표로 “미스 어스(earth)”에 참가했다.또 학군 장교(ROTC)59기로 임관시키고 2021년부터 육군 특수전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올해 6월 30일 중위로 전역했다.”군에 대한 목표도 분명했고, 진급 욕심도 컸습니다.주위의 모두가 만류했지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4년 전에 못한 메달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미스 코리아도 카바디를 알리고 싶고 도전했다.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결국 올해 6월, 중위로 예편 후 선발전을 치르는 대표팀에 합류하며 아시아 경기 메달 때문에 중국 항저우행을 택했다.올해 5월에 열린 국가 대표 선발전에서 여자부 전체 3위로 당당하게 태극 마크를 차지하기도 했다.강한 꿈을 안고 2번째 아시아 대회에 출전했지만 아쉽게 메달을 따지 못 했다.그러나, 카바디를 위한 우·희준의 열정과 노력은 박수를 받아 마땅하다.무엇보다 “국위 선양의 “목표를 항상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우·희준이는 미스 코리아에 도전한 이유도 비인기 종목 카바디의 홍보 때문이었다며 카바디에 대한 애정을 감추지 못 했다.우·희준이는 “훗날”생각은 없다는.”『 이 순간만 살』게 카바디에만 집중하고 있다”로서 “그 후는 생각한 적이 없다”이라고 말했다.카바디가 비인기 종목의 슬픔을 극복하려면 아시아 대회처럼 큰 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그게 가장 확실한 지름길이다.이처럼 대한민국의 카바디는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선수들은 종목을 위한 자부심을 가지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걷고 있다.건강한 대한민국을 목표로 하여 무한 도전 중인 국가 대표 선우·희준이 선수를 통해서 한국의 카바디에 대한 관심과 뜨거운 열정이 이어지길 기대한다.Editor최·산성 Photographer이·잉용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운영하던 도장에서 태권도를 배우고 순발력을 키운 우·희준이는 초등 학교 시절, 육상 허들 선수로 뛰었다.그 뒤 중학생 때부터 스포츠 리딩 선수로 변신했다.고교 재학 중에 교환 학생으로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세계 리딩 대회 출전 경험도 쌓고 영어 실력까지 키우고 돌아왔다.고등 학교를 졸업할 때 대학 수시 모집과 한국 관광 공사 입사 시험에 동시 합격한 우·희준은 한국 관광 공사 사상 최초의 고졸 사원이 되는 길을 택했다.입사 후 6개월 동안 통역 업무를 하고 있던 우모, 희준이는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어서 사표를 내고 인도로 떠났다.그리고 인도에서 카바디를 만났다.인도의 아이들과 함께 길가에 분필로 선을 긋고 코트를 그리며 카바디를 경험하고 인터넷을 검색하면 한국에도 카바디가 있었다.이 종목다면 자신의 텃밭인 순발력을 살려서 국가 대표까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우·희준이는 귀국 후 부산에 있는 카바디 협회를 방문, 카바디를 시작한 1년 후의 2015년에 태극 마크를 달았다.그 뒤 2018년 아시아 경기 대회가 끝난 뒤 중국 유학을 다녀오면서 2019년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에서 선발에 선정되어 한국 대표로 “미스 어스(earth)”에 참가했다.또 학군 장교(ROTC)59기로 임관시키고 2021년부터 육군 특수전 사령부에 근무하면서 올해 6월 30일 중위로 전역했다.군 복무 기간에는 레바논 파병에 다녀온 것도 있다.그가 전역을 희망한 것은 항저우 아시아 대회를 100%준비하고 싶었다.카바디, 국가 대표 우모·희준 전역까지 만들어 만든 키·기우·희준이 국가 대표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버지 때문이다.아버지는 딸이 중학생이 되면 태권도 도장을 그만두고 경찰이 됬다.”아버지가 성 범죄자의 칼에 찔려배꼽 위에 길이 10센치 정도의 상처가 생긴 게 있었다.어머니가 “안정적인 일을 그만두고 이것이 무슨 고생인가”라고 하자 아버지는 “내가 이렇게 열심으로 나라를 지키기 때문에 우리 가족이 안전하게 되기”라고 대답했다.그때부터 “나도 나라를 위한 일을 하고 싶다”다는 꿈이 생겼다고 말했다.우·희준이는 인도에서 돌아오자마자 부산에 있는 카바디 협회에 연락하고” 그렇게 좋으면 오고 한번 배우고 본다”라는 대답을 얻었다.그러나, 카바디는 순발력만 좋다고 할 종목이 아니었다.카바디를 시작한 2년 후의 2015년 태극 마크를 달았지만 국가 대표 선수들의 근력 트레이닝에 대해서 안었다.벤치 프레스를 할 때 아령을 하나도 싣지 않은 바(20kg)만 갖지 않을 정도였다.우·희준이는 1년간”강철 덩어리”를 갖고 또 가진 끝에 벤치 프레스의 무게를 60kg까지 늘렸다.근력이 입증되면서 키(172㎝)보다 긴 다리(110센치)를 쓴 “백 킥”도 위력을 더 발휘하기 시작했다.우·희준이는 한국 여자 카바디 대표 팀의 2016년 부산 아시아 선수권 대회 금메달 획득을 도왔다.한국이 이 대회 여자부에서 우승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2018년에도 카바디 국가 대표로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 대회에 출전했다.한국은 이번 대회에서 역대 최고 성적인 5위에 올랐다.한편 2020년에 학군 장교(ROTC)59기로 임관한 우·희준이는 불과 4개월 전까지 레바논에서 통역 장교로 근무하고 있었다.”여군 특 전사”이란 제목과 파병지에서 국위 선양하고 있다는 자부심도 대단했다만, 항저우 아시아 대회의 메달만은 포기하지 못 했다.”군에 대한 목표도 분명했고, 진급의 욕심도 많았습니다.주위의 모두가 말렸어요.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4년 전에 못한 메달이 늘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미스 코리아도 카바디를 알리고 싶고 도전한 것입니다.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우·희준에게 아시아 대회는 2018년 이후 2번째 도전이었다.”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때와는 확실히 달랐다.그때는 경기를 즐기고 있었지만 지금은 부담이 크고 책임감도 각별합니다.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하던 군인의 길을 포기하고 택했다니, 메달을 목에 걸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항저우 아시아 대회 준비 때문에 매일 생지옥 같은 훈련을 계속했다.새벽 5시 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주말도 없이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카바디가 개인의 기량은 물론 팀의 결속력이 중요한 종목이어서 무엇이든 2배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우·희준에게 카바디가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이에 대해서 그는 “나의 20대가 거의 카바디이었다”라고 입을 열었다.”21살 때부터 카바디라는 운동을 해서, 9년 가까이 한 것입니다.운동과 훈련에 나의 20대의 대부분을 사용하여 어떤 경험보다 의미가 큽니다.그래서 카바디으로서 아시아 대회의 메달을 따지 못한 것이 늘 유감이였다고 생각합니다.선수로 아시아 대회의 메달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선수 생활에 마침표를 쓸 수 없는 느낌이었어요.이번에 메달이 될지는 모르지만, 2번째 도전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더 발전한 실력과 함께 금메달을 따기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결과가 어떻든 이번에는 후회와 아쉬움이 남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그냥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대한 카바디 협회의 노력 덕분에, 카바디의 매력에 흠뻑~카바디는 그 근원부터 현대까지 다양한 변화와 발전을 경험하고 남 아시아 국가에 큰 인기를 끌고 있다.특히 대한민국에서도 카바디는 아시아 대회를 통해서 소개되면서 점점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대한 카바디 협회의 노력 덕분에 국내에서도 카바디 스포츠의 매력을 알리는 기회가 늘어났으며 향후도 이러한 활동과 노력이 이어 카바디가 국내 스포츠 문화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 매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2016남자 세계 카바디 월드컵에서는 한국과 인도가 개막전을 했지만 한국이 인도에 이겼다.개막전을 멋지게 지고 말았다 인도는 한동안 난리가 났다.그리고 한국은 5전 전승을 거두며 조 1위로 베스트 4에 진입했으나 베스트 4차전에서 이란에 22-28로 패했다.이란을 제치고 1위로 베스트 4에 오른 태국은 한국에 이어조 2위에 오른 인도에 73-20에서 학살됐고, 결승은 인도-이란전.결국 인도가 38-29로 이겼고 또 우승했다.여기에서 조 1위에 오른 한국을 만나러 다른 그룹의 이란은 조 2위에 오르자 약체로 고의로 패하고 스포츠맨십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그만큼 인도는 무서운 존재라는 것이다.최근에는 카바디 한국 여자 대표팀의 활약도 돋보이고 있는데, 아시아 경기에서는 메달은 없지만 비치 아시아 대회 3번 동메달, 2016년에 열린 제4회 아시아 여자 카바디 선수권 대회에서 무려 금메달!인도 대표 팀의 일정이 맞지 않고 유일하게 인도가 참여하지 못한 대회이기도 하다.2017년에 열린 제5회 아시아 여자 카바디 선수권 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내며 한국 카바디 사상 첫 금메달, 은, 동메달을 모두 획득한 저력을 보였다.2018자카르타, 팔렘방 아시아 대회에서는 한국 남자 카바디 대표 팀이 조별 리그에서 종주국인 세계 최강의 인도를 제압하는 이변을 만들어 냈다.인도는 1990년, 카바디가 아시아 경기 대회에 처음 도입된 뒤 첫 패배를 당했다.그 뒤 남자 대표팀은 결승까지 진출, 이란에 패했지만 은메달이라는 아시아 대회 출전 이후 최고 기록을 세웠다.인도는 베스트 4에서 이란에 패하면서 사상 첫 금메달 획득에 실패했다.게다가 여자 대회에서도 결승에서 이란에 패해은메달에 그쳤다.이로써 이란은 남녀 카바디 금메달을 휩쓸게 됐다.앞의 항저우 아시아 대회에서 인도는 남녀 모두 금메달을 획득하고 5년 전의 부진을 털어냈다.다만 남자는 이란에 26-25의 땀 승으로 간신히 이겼다.이란은 남자 은, 여자 동메달을 받고 대만은 남자 동메달과 여자 은메달을 받았다.우·희준이는 “아시아 대회를 통해서 많은 분들이 카바디를 한번이라도 하고 보고 싶어 관심한다면 그것은 메달 외에 또 다른 목표를 이룬 것이다”라고 말했다.여자 팀은 종주국인 우승 후보 1위의 인도와 조별 리그 2전에서 23-56으로 뒤진.여자 대회는 7팀이 2개 조로 나뉘어 각 조 상위 2팀이 준결승에 진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만 2패를 만났던 한국은 최종전인 대만전을 앞두고 조별 리그 탈락이 확정됐다.많은 관심 받아 평생 2번째 아시아 대회에 출전한 우·희준은 조별 리그에서 3전 전패를 당하며 2018년 자카르타, 팔렘방 대회(5위)에 못 미치는 성적으로 2번째 도전을 마쳤다.우·희준이는 바라는 것을 이루지 못했지만 앞으로도 카바디 홍보에 전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2019년 마스 코리아 미국 스스로에게 동기 부여 2019년 친구들의 권유로 미스 코리아 부산·울산 지역 예선에 출전했다.”부모님에게는 말하지 않고 출전했다.그런데 어머니가 “나의 꿈이 미스 코리아였다”라고 기뻐했다”이라고 말했다.지역 예선을 거쳐서 본선에 진출한 그는 49명 중 2위에 해당하는 선에 뽑혔다.미스 코리아 대회 참가자들과 1개월 간 합숙했다 그는 “화장법이 잘 몰라서 동료들에게 배웠어요.대신 저는 오리 걸음의 방법을 가르쳐서 주고, 동생들이 나를 ” 온 장(엉덩이야)”라고 불렀다”로 “성형 수술을 하지 않은 미인을 『 자연 미인 』으로 부르지만 저는 그냥 『 자연인 』입니다.카바디를 ROTC의 명예에 먹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완전히 싸웠시오.”이라고 말했다.우·희준이는 또 하나의 이력을 추가했다.충북 충주(츄은쵸은푹토·충주)에서 개막하는 세계 무예 마스터 리그에서, 카바디를 영어로 중계하는 아나운서로 나오기도 했다.그러나 방송계의 많은 청혼을 거절하고 군대로 경기장으로 돌아갔다.”지금까지도 소셜·네트워킹·서비스(SNS)을 통해서 미스 코리아 대회에 관심을 갖고 찾아온 여군 여자 운동 선수들이 있습니다”와 이상하게 맞았고”활동 당시에도 군인 신분이어서 상업 광고 등 제약이 많았지만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고 회고했다.”미스 어스 2019″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미의 사절로 국위 선양한 기억도 갖고 있다.”미스 코리아 대회가 자신의 건강한 가치관을 알리는 데 많은우·희준의 미스 코리아 당선은 지금까지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에 의해서 얻은 편견을 깰 기회나 됐다.당당하고 건강한 가치관으로 자신의 길을 열어 가우·희준의 행보는 차세대 여성 리더를 선발, 양성하려는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의 지향점과 어울리는 여성 인력의 도전 정신에 불을 붙였다.”최근에는 같은 학군 사관 후보생, 여군에서 다른 운동 선수까지 미스 코리아 선발 대회에 출전하겠다고 생각한다고 연락이 옵니다.그런 때는 저는 항상”뭔가를 인위적으로 배우고 꾸미려 하지 않고 자신만의 아름다움을 잘 보이고 주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조언합니다.새로운 직종 분야에서 일하는 많은 여성들이 미스 코리아 대회를 편견 없이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위한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에게 찾을 때”나의 발걸음이 제 또래의 여성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실제로 요즘의 미스 코리아 대회에는 보다 다양한 직종, 전공 학교가 많이 나오거든요.그분들이 출전하는 데 하나의 용기를 주는 사람이 됬구나라는 감사하거나 자신들에게 동기 부여나 되는 것 같기도 합니다”군인이 되고 싶어 울산 대학 ROTC59기 임관의 우·희준이는 수많은 수식어와 메달, 트로피를 거머쥐었다.공학부 학생, 국가 대표, 미스 코리아라는 이름으로 지성과 체력, 외모의 삼박자를 고루 갖추고 있다.바로 그녀 자신의 힘이고 스스로와의 싸움 시간이었다.울산 대학교 앞에서 카바디 종목의 대표 선수로 운동을 5년 정도 했다.처음에는 운동 선수로서 올림픽이나 아시아 대회에 나가서 메달을 따는 게 가장 큰 목표에서 국가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매 순간 자부심과 보람을 느꼈지만 이후 직업을 갖기로 되어도 이 같은 느낌을 느끼고 싶었다.아버지도 경찰에서 자연스럽게 군인을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아버지의 권유도 없지 않았다.알아보니 군인들 양성 제도가 있어서 지원하게 됐다.군인이 되고 싶다는 꿈에 부모님의 반응은 처음부터 확신했던 것이 아니라, 반신 반의로 하고 싶다고 했지만 적극 추천했다.이전부터 아버지도 나에게 여경과 여성 군인이 되라고 하고 있었지만, 당시는 스포츠 선수여서 집중해서 듣지 않았다고 한다.그러다가 나이를 먹고 운동 선수 이후에도 명예로운 직업을 찾고 있는 사이에 군인을 생각하게 된 것이다.어머니도 결혼 전에 군인을 꿈꾸던 분이어서 모두 장기 복무까지 하는 게 어떨지 적극 권유했다.울산 대학교에 입학한 우·희준이는 미스 코리아에 당선된 뒤 갑자기 직업 군인으로 전향하기에 성공했다.우·희준이는 “임관하기 전부터 특전 사령부라는 목표가 확실하였습니다”로 “체력적인 특기가 크고 이를 이용하고 특수한 작전에 대한 임무를 수행할 것이 꿈이었습니다”과 군 복무 당시를 회상했다.소위로 진급한 뒤 처음으로 보직으로 수색 중대 수색 소대장을 거친 우·희준이는 특전사에 위한 문을 두드리고 끝, 여군 소위로는 처음으로 특전 사령부에 배치됐다.이후 특전사로 군 생활을 해온 그는 지난해 6월 레바논 파병에 합격하고 지난해 9월부터 올해 5월까지 통역 장교로 임무를 수행했다.”파병은 항상 나의 버킷 리스트여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통역 장교라는 보직 자체가 군사 외교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보직인 데다 체력적인 부분, 외국어적 능력이 필요해서 개인적으로는 재미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제 능력과 말에서 군사 외교를 실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슴이 꽉 찼어요.레바논은 365일 전시 상황이지만 그런 위험한 상황에서 레바논 시민뿐만 아니라 국제 평화를 위해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자부심도 컸습니다.”처음이란 글자는 그가 내딛는 모든 행보에 대한 책임을 의미한다.많은 사람들이 기대와 걱정의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그러나 여자가 아니라 군인으로서 계급과 직책에 대한 임무를 완수할 때 처음”최초”라는 글이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한국군 전반에 여성 인력의 전문성과 능력을 발휘할 분야가 확대했다.여성 인력이 군인으로서 임무를 발휘할 수 있도록 제도와 환경적 측면에 많은 변화가 있어 군내의 여성 인재를 바라보는 동료 전우들의 인식 수준도 과거와 달라졌다.국가와 국민 때문에 자신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두려움 없이 도전하고 보라.”ROTC는 애국심의 원천, 선수 생활에 상당한 도움””나에게 ROTC는 애국심의 원천입니다.국가에 봉사하면서 안보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른 나이에서 조직을 관리하고 또 조직에 함께 하는 방법을 일러 줬다. 소중한 기회였습니다.”모교인 울산 대학교 ROTC회에 참가하우·희준이는 카바디 선수 생활에서도 ROTC경험이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고 회고했다.국가 때문에 헌신하는 리더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현실화할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었습니다나라를 보는 시야도 넓혔다.”통역 장교로, 엄청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우리를 이끄는 단장이 대령에서 대령을 맞이하면서 주로 군사·외교 관련 업무를 많이 했어요.또 다른 부대의 외국 군단장과 소통을 위한 통역 업무 지원 등, 지금 생각해도 중위로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통역 장교를 하면서 한 것 같아요 “우·희준이는 그래도 제대를 결심한 이유는 군 생활을 계속하면서 나는 목표가 확실했기 때문이다.우·희준이 느낀 ROTC의 매력은 무엇일까.제대하면서 깨달은 것은 ROTC자체가 나에게 큰 배경이 되어 주고 자신감을 갖고 주는 존재라는 생각이 듭니다.또 1기부터 60번 이상까지 다양한 세대를 망라하지만 실제로 마주 하면 세대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유화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시대가 바뀌면 조직도 탄력적으로 바뀌겠지만 3무·1존·3예 같은 ROTC만의 고유 문화는 영원히 계속되길 바라고 있습니다 또한 진심으로 화합하는 23만 ROTCian이 되기를 기원했다.”충성”라는 표현을 자주 쓰지만, 아츠코에게 마음의 마음이 담긴 것처럼 선배에게 존경을 후배에게 사랑을 동기하고 우정을 나누는 문화가 진정성을 지니고 유지되기를 바랍니다이와 함께 좋은 기회를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하고 함께 하게 되어 영광이라며”처음의 여성인, 가장 어리다고 들었습니다.”처음”라는 글자에 대한 책임에서 리다즈 월드의 표지 모델이 된 만큼 향후 행보에서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저의 이력에 대해서도 부끄럽지 않도록 ROTCian으로 자랑스럽게 선배인 후배로서 남도록 하겠습니다.우·희준이는 다시 한번 멋진 선배들과 함께 있어 영광이며 향후 도움이 되는 부분이나 지원할 부분이 있으면 언제라도 적극적으로 임하라는 말을 거듭 남긴.앞으로 국가 대표 카바디 선수로 중대한 기로에서 ” 그래도 제대로 진행된다”올해 30세, 카바디 국가 대표 우모, 희준의 인생은 어떨까.” 어려서부터 각별한 체격과 끈기를 인정 받으며 성장했고 학생 시절에 주변의 친구나 선생님들에게 군인이라는 직업이 잘 어울릴 것 같다는 소리를 들어 있었으므로, 나도 자연히 군에 대한 관심이 된 것 같아요.군인이 되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확산될 것이고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도 더 강하게 단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 군인을 골랐습니다”평소 체력 관리의 비결은 꾸준함이라며” 어린 시절의 체력과 운동 신경이 좋았고, 특별한 비결은 꾸준함이 비결이라고 생각합니다.세상에 안 되는 일은 없습니다.꾸준히 포기하지 않고 노력 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을 운동을 하면서 깨달았어요 “마지막으로 카바디 선수의 소원 말을 잊지 않았다.”말씀 드렸듯이, 대한민국 카바디는 화려한 스포트 라이트를 받지 못했지만 종목을 위한 자부심을 가지고 묵묵히 자기 길을 걷고 있다.아시아 대회 이후, 카바디는 발전하고 있고, 아시는 분도 많아지고 있습니다.당장의 실업 팀에 대한 후원은 없지만 올해 연말이 되어도 내년이 되든, 하여간 될 것 같습니다.비인기 종목의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카바디 선수들 역시 카바디 홍보에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그래서 저는 지금도 카바디를 처분하지 않고 있습니다.만약 은퇴를 해도 후배 선수들이 지속적인 지원을 받으며 훈련할 수 있도록 카바디 알리미 활동을 계속합니다.”군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아시아 대회 출전을 결정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 지금이 아니면 되지 않는 듯했다 』다는 말도 이어졌다.”저는 군 생활을 장기적으로 바라보고 들어간 사람이 지휘자 역할을 하고 싶어서 계속 진급을 거듭했습니다.그래서 제대를 결심하면서 주변에서 여러 분들이 “당신은 군에 남지 않으면 안 된다” 붙잡거나 걱정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아니면 안 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군 생활의 경우 내년, 후년에도 다시 임관이 가능한 제도는 있으나 아시아 대회는 시간이 지나면 지금 같은 기량을 선 보이는 것이 어려운 것 같아서 더 늦기 전에 게임에 다니고 싶다는 욕구가 컸던 것입니다”아시아 대회가 끝난 현재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을까.우·희준이는 대답했다.”아직은 잘 모릅니다.무엇을 하더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사실 저는 재작년부터 또래 여성 쪽에서 인스타그램의 DM과 휴대 전화의 메일로 연락을 많이 들었습니다.현역 여성 군인, 여자 선수, 여대생 여러분이 나를 보고동기가 올라가면서 용기를 얻었다고 하던데요.모자란 부분을 충족하고자 했던 것이 누군가의 힘이 된다고 생각하니 무척 기분이 좋았습니다.응원과 격려에 보답하다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습니다”공명심을 선량한 영향력으로 표출시키고 여성 장교의 주역으로 발돋움한 자랑스러운 ROTCian, 카바디 국가 대표 선우·희준.국가 대표로 미스 코리아를 병행해서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적인 자세로 젊고 건강한 국가 대표의 표상으로 자리 매김한 모습에서 한국의 카바디의 희망을 읽었다.